제   목 : Science Times - 로베르트 코흐
게시자 : 관리자 jmchae@knu.ac.kr http://formed.knu.ac.kr 등록일 : 2005-05-16 오후 10:11:04 조회 : 4129
마법의 탄환을 쫓아서(3), 로베르트 코흐
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39
<발효연구에서도 행운이 계속되다>
▲ 전시장의 포도주-파스퇴르의 저온살균법은 각종 식품과 음료수의 저장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사진 tlsdo21121)  ⓒ
파스퇴르는 자연발생론에 대한 논쟁의 와중에 완승을 거둔 공적을 인정받고 나폴레옹 3세를 알현했다. 그는 황제에게 질병의 원인이 될지 모르는 미생물을 발견하는 것이 자신의 야망이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더 중요한 실험이 필요하다는 것 즉 자신이 옳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만인들에게 각인시켰다.

그는 공기 중의 먼지가 질병과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발진티푸스, 콜레라, 황열 등 많은 전염병들이 공기의 먼지 때문에 생긴다는 설명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었지만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원인모를 전염병의 원인이 미생물인지 확인되기도 전에 발표한 그의 설명은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그럴듯한 실험실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실험실이 구비되자 자신이 전에 연구한 경험이 있는 포도주 생산에 눈을 돌렸다. 그는 포도주를 만드는 것은 효모이지만 포도주를 상하게 만드는 것도 미생물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파스퇴르는 발효가 끝난 포도주를 약 60도의 열로 한 시간 정도 가열하면 세균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방식은 포도주의 맛과 향, 색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세균을 죽일 수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으며 저온살균법이라 불린다. 파스퇴르의 저온살균법(pasteurization)은 산업화하는데도 성공하여 프랑스 포도주 산업에 획기적으로 공헌했으며 현재도 식품, 우유, 맥주 등의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유지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포도주 산업의 구세주 파스퇴르에게 이번에는 식초업자들이 달려갔다. 파스퇴르는 포도주가 식초로 저절로 변하는 식초 통을 조사했고 이상하게 생긴 찌꺼기가 통 속 액체의 표면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파스퇴르는 나무 통 속에 있던 덩어리들이 수십억 개의 미생물덩어리라는 것을 알아냈다.

파스퇴르는 식초 업자들에게 포도주를 식초로 만드는 미생물들은 며칠 만에 자기들 몸무게의 1만 배가 되는 알코올을 먹고 그것을 식초로 바꾼다고 말했다. 또한 포도주에 산소를 넣으면 보다 효율적으로 식초를 만들 수 있다고 조언하여 식초업자들을 감격시켰다.

이런 과정에서 파스퇴르가 나폴레옹 3세에게 말했던 작은 소망 즉 인간에게 질병을 안겨주는 미생물을 찾겠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이다. 포도주, 맥주, 식초 등을 만드는 미생물의 엄청난 능력을 본 파스퇴르가 작은 동물이 황소나 코끼리 혹은 사람의 몸속에 들어와서 죽음을 초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파스퇴르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이 그가 사망할 것을 예상해 새로운 실험실의 공사를 중단했다. 폴 드 크루이프는 파스퇴르가 실험실의 공사가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더 살기로 결심했다고 적었다. 물론 파스퇴르는 이 일로 몸의 한쪽이 마비되었고 평생 동안 불편한 몸으로 지냈다.

파스퇴르는 맥박을 재거나 까다로운 환자를 진료해 본 적이 없는 화학자 출신 의학 연구자이다. 학자들은 파스퇴르가 폐와 간을 구별할 수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고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의학 연구자로서의 명성이 계속 쌓여가는 동안에도 파스퇴르는 자기 시간의 대부분을 미생물이 전염병에 있어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으로 보냈다. 하지만 파스퇴르보다 21년 후배라고 볼 수 있는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가 그를 앞서고 있었다. 파스퇴르는 반드시 코흐를 따라잡아야만 했다.
연대 상 다소 중복되고 선후의 차이가 있지만 파스퇴르의 후반을 설명하기 전에 코흐를 먼저 설명한다.

<최다 우표의 모델 로베르트 코흐>
▲ 코흐 우표-결핵균 발견에 대한 코흐의 논문이 도안되어 있는 결핵균 발견 100주년 기념우표(자료 예병일)  ⓒ
우표 모델로 최다 출연한 과학자를 꼽으라면 정답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벨상을 수상한 ‘세균학의 창시자’ ‘로베르트 코흐’라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는 결핵균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에이즈를 발견한 과학자의 우표도 발행된 적이 없는데 결핵균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 전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우표의 모델로 사용했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인류에게 공헌한 바가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된다면 그 생각은 달라질 것이다.

코흐가 과학자로서 파격적으로 명예로운 대우를 받는 것은 그의 연구가 다른 어떠한 과학자보다 인간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사실상 코흐는 19세기 후반 의학계가 배출해 낸 세균학의 최고 권위자로서 파스퇴르와 함께 슈퍼맨 중의 슈퍼맨이었다.

코흐는 1843년에 독일(당시는 프러시아) 하르쯔산의 한 탄광촌에서 광산기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신문으로 혼자 공부하여 글자를 읽고 써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신동이었는데 초·중등학교 당시에 생물학에 취미를 보였고 차분하고 끈기 있는 소년으로 알려졌다.

1862년 괴팅겐 의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1866년 의학박사를 취득하였고 졸업 후에 세포 병리학의 창시자이자 ‘의학의 교황’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던 루돌프 비르효(Rudolf Virchow, 1821~1902) 밑에서 6개월간 수학했고 보불전쟁에도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비르효는 공중보건위생의 개선뿐만 아니라 의학 분야의 근본적인 개혁에 커다란 공을 세운 사람이다. 특히 그는 ‘의학이란 거시적으로 보아 사회과학이며 정치학이다’라고 말하는 등 의학 분야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비르효는 의학과 의술이 그 자체나 의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정신과 또 그러한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학이 갖는 정치적인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강연하는 비르효-비르효는 모든 세포는 세포에서 생긴다는 세포학설을 확립. 세포가 바로 질병이 생기는 자리라는 세포병리학설 수립. 그러나 비코흐의 세균병인설을 처음엔 인정하지 않았다  ⓒ
그가 의학의 정치성을 강조한 것은 국민 건강을 증진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 보건 의료에서의 변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1848년 가난한 북부 실레지아에서 발생한 발진티푸스가 창궐한 뒤 프러시아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비르효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 황상익 박사의 글에서 인용한다.


‘이것은 더 이상 발진티푸스에 걸린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의학적 치료와 간호를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육체적으로 최대로 쇠약해진 150만 시민의 안녕에 관한 문제이다. 150만 명의 주민을 생각할 때 언제까지나 미봉책으로 대할 수는 없으며 근본적인 개선책을 찾아야 한다.

정부가 이 문제에 개입하기를 원한다면, 주민들이 힘을 합치도록 격려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교육·자유·복지는 지금까지와 같이 밖에서 주어지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한 성과를 얻을 수 없으며, 주민들이 스스로 그 필요성을 자각할 때에만 진정 그것을 이룰 수 있다.’

의학의 정치성을 강조했던 비르효의 의학적 업적은 정맥의 염증을 연구하여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혈전(血栓)과 색전(塞栓)의 형성 기전을 규명한 것과 출혈성 백혈병이라는 병의 존재와 특성을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특히 비르효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세포는 건강한 사람이나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생체 기능의 시작이자 발판이며 모든 세포는 세포에서 생긴다’는 ‘세포학설’을 확립했고 또한 세포가 바로 질병이 생기는 자리라는 ‘세포병리학설’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단기간이나마 비르효에게 수학했던 경험은 코흐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짝사랑했던 에미 프리트와 결혼하면서 시골인 홀스타인 지방에서 자신의 병원 간판을 걸고 개업의가 되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지 3년 만이었다.

1870년 보불전쟁이 벌어져 프로이센 군대의 군의관으로 출정한 몇 달을 제외하고 그는 개업의로서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환자가 없어 적적해하는 남편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현미경을 선물한 것이 그의 인생을 세균학자로 이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코흐가 현미경을 선물 받았을 무렵 유럽의 여러 지방에서 탄저병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 병에 걸린 양이나 소는 일단 감염되면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죽었으며 사람들도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폴란드의 한 수의사가 병사한 동물의 혈액 중에 작은 간상체(막대모양)가 다수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나 이것이 병의 원인인지, 아니면 병의 결과인지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또 어느 수의사는 병사한 동물의 혈액을 건강한 동물에게 주사하면 그 동물은 탄저병에 걸리는데 병에 걸린 동물의 혈액이면 그 안에 간상체가 없더라도 탄저병을 옮긴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코흐는 수의사들의 발표에 주목하고 탄저병에 대한 관심이 생겨 연구를 시작했다.

▲ 괴팅겐 시내에 있는 그림형제가 쓴 동화의 주인공 거위 소녀상-괴팅겐은 도시 전체가 대학교로 볼 수 있는데 코흐는 이곳에서 의과대학을 다녔고 비르효 교수로부터 지도받음(사진 김현종)  ⓒ
탄저병에 걸린 동물의 혈액을 실험용 쥐에 주사하자 쥐는 하루 만에 죽었으며 죽은 쥐의 혈액에서도 간상체를 다수 발견하였다. 간상체는 길게 실 모양으로 늘어서기도 했고 작고 둥근 모양으로 분리하여 포자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 세균은 환경의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지만 일단 포자가 형성되면 주변 환경에 대한 저항력이 강해져 어떤 상황에서든 견뎌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어서 코흐는 자신이 만든 수수 배지에서 간상체, 즉 탄저균을 배양하는데 성공했으며 이렇게 배양한 균을 다른 동물에 주입하여 자신이 뜻한 대로 탄저병을 일으킬 수 있었다.

코흐는 탄저병이 탄저균이라는 특정한 병원균이 일으킨다는 사실을 입증했지만 대단히 신중하고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비슷한 실험을 몇 백 번이 넘도록 되풀이하여 탄저병에 걸린 동물의 혈액을 건강한 다른 동물에 주입하면 다시 탄저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두 번째 동물에서 채취한 혈액을 세 번째 동물에 주입하면 오히려 탄저병이 더 빨리 발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이런 과정을 거듭할수록 탄저균의 독성은 더욱 강해져 나중에는 탄저균이 혈액에 있는 다른 세균들을 거의 다 죽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계속하여 탄저균을 분리하고 배지에서 순수 배양을 하여 탄저균의 중앙부가 끊어지면서 분열⋅증식하는 양상도 파악했다. 또한 탄저균은 약하고 잘 죽지만, 그 포자는 저항력이 강해 공기 중이나 흙 안에서 오래 생존하며, 동물체 내에 들어가면 다시 세균이 되어 증식하면서 탄저병을 일으킨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즉 포자는 동물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생기지 않고 동물이 죽은 다음에만 나타나고 또한 동물이 따뜻하게 보존될 때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포자는 병을 옮길 수 있는 대상을 찾았을 때만 작동을 한다는 뜻이다.
1876년 5년에 걸친 자신의 연구에 확신을 가진 코흐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코흐는 세균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코흐의 공리’를 제시했다.

이 당시 코흐가 자신의 연구를 발표한 상황은 전설적이다.

코흐는 원래 학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홀스타인 지방에서 가난한 의사로 생활하면서 연구를 했기 때문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코흐는 브레슬라우 대학(현재는 폴란드의 브로츨라프)에 있는 학창 시절의 은사로 세균 분류의 권위자인 콘(Hermann Cohn, 1828〜1898) 교수를 찾아갔다.

코흐의 설명을 들은 콘은 코흐의 연구에 흥미를 가질지도 모르는 여러 명의 교수를 불렀다. 그 중에는 유명한 병리학자 율리우스 콘하임(Julius Cohnheim, 1839〜1884) 교수도 있었다. 코흐가 3일간에 걸쳐 여러 해 동안 실패를 거듭하면서 얻은 자신의 연구 내용을 설명하자 콘하임 교수는 젊은 연구생들이 있는 연구실로 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모든 일을 멈추고 지금 바로 닥터 코흐의 실험을 보시오. 그야말로 위대한 발견을 한 사람이요."


이때 코흐의 방으로 간 젊은 연구생 중에 한 명이 나중에 코흐의 제자가 되어 ‘마법의 탄환’이라고 불린 살바르산(606호)를 발견한 파울 에를리히(Paul Ehrlich, 1854~1915)이다.
코흐가 이 당시 교수들을 놀라게 한 또 다른 요인은 탄저병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도 제시했기 때문이다.

“탄저병으로 죽은 모든 동물은 죽자마자 없애버려야 합니다. 만약 태워버릴 수 없다면 땅 속 깊은 곳에 묻어야 합니다. 흙이 차가워져 막대균이 강하고 오래 견디는 포자로 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탄저병균-생물학무기로 미국테러에 사용된 탄저균으로 학명은 바실러스 앤스래시스(Bacillus anthracis)이다  ⓒ
코흐에 의한 탄저병의 병원체인 탄저균 발견 뉴스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 무렵 세균학 연구의 제1인자는 프랑스의 파스퇴르였다. 탄저균의 발견으로 코흐에게 선수를 놓친 파스퇴르는 1881년이 되어서야 탄저병 예방 접종 백신요법으로 코흐의 명성을 추월할 수 있었다.

코흐의 대 발견도 혈액응고에 대해 결정적인 연구를 한 루돌프 비르효(Rudolph Virchow) 교수로부터 문전박대를 받았다고 황상익은 적었다. 비르효는 세균병인설을 인정치 않았기 때문에 코흐가 논문을 갖고 찾아갔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1891년 결국 비르효도 세균병인설을 인정했다.

여하튼 코흐는 탄저균 발견으로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궁핍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세균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미생물과 세균을 염색하여 현미경 사진을 찍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것 역시 세균학에서의 획기적인 진전으로 세균학을 다시 한 차원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사진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사람들이 사진을 보면 살인적인 벌레들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현미경을 볼 수가 없고 또 하나의 세균을 보고도 두 사람이 똑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러나 사진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므로 열 사람이 그것을 연구해도 동일한 의견에 이를 수 있다.”

탄저균은 2001년 전 세계를 강타한 생화학 테러의 주범이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생화학무기도 특성에 따라 크게 분류하면 생물학무기와 화학무기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이름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질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이나 바이러스들이 이용되면 생물학무기이고,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이 이용되면 화학무기로 분류된다.

2001년 미국에서 발견된 백색가루의 형태는 바로 탄저균의 내생포자 형태로, 경구나 흡입을 통해 감염된다. 사람이 이러한 탄저균의 내생포자를 흡입하면 소장으로 들어가 증식을 한다. 뒤에 이 탄저균이 혈액으로 들어가게 되면 패혈증을 일으켜 사망에 이르게 된다.

테러분자들이 미국 테러에서 생화학무기를 사용한 이유는 이 탄저균 내생포자가 갖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탄저균 내생포자는 일단 감염이 되면 하루에서 길게는 일주일 정도의 잠복기간을 갖는다. 세균 역시 색이나 맛, 냄새가 없는 무색, 무미, 무취의 특성이 있어 이것을 공기를 통해 전염시키면 감시나 추적을 받지 않고 테러에 이용할 수 있다. 따라서 비행기 테러나 자살테러처럼 테러요원의 파견 없이, 우편 등의 방법으로 탄저균 내생포자를 보낼 수 있다.

만약 테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이 우편물을 펴보게 되면 공기 중으로 탄저균 내생포자가 퍼져 같은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감염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다행하게도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탄저균에 대한 항생제가 개발되어 있는 상태로 미국에서의 희생자는 크지 않았다.

<파란만장한 코흐의 일생>
▲ 남아프리카에서 연구하는 코흐-코흐는 질병이 생기는 현장에 직접 가서 병원균을 연구했다. 사진은 1897년 남아프리카의 텐트 속에서 열대병과 우역을 연구하는 장면이다  ⓒ
1880년 독일 정부는 코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베를린국립보건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한다. 초등학교 야구선수가 메이저리그 선수로 등록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교될 만큼 그의 임명은 파격적이었다.

코흐는 37세에 비로소 자신이 완성한 일에 합당한 연구 시설, 두 명의 조수 및 풍족한 연구비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코흐가 연구소를 전 세계의 연구자들이 모여드는 중심지로 자리 잡도록 유도하자마자 단기간에 실적이 점점 쌓이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학자들이 발견하려고 애태우던 결핵균 병원체의 발견에 도전했다.

당시 결핵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 원인이 어떤 종류의 미생물임에 틀림없다는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결핵은 병든 사람에게서 건강한 동물에게로 전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브레슬라우의 콘하임 교수는 폐병환자의 병든 폐 조직을 토끼 안구의 전실에 넣으면 결핵에 걸린다는 것을 발견했다. 코흐는 콘하임 교수의 실험을 자세히 연구했다.

그가 다른 학자들보다 빨리 결핵균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시료 조직을 강력한 염색액으로 염색하는 기술을 익혔기 때문이다. 드디어 코흐는 죽은 파란색으로 염색된 폐 세포 사이로 작고 아주 가는 간균들이 모인 이상한 덩어리를 발견했다. 일직선으로 된 탄저균과 같은 모양이 아니라 조금씩 구부러져 있었다. 더구나 그것들은 너무나 가늘어서 1만 5000분의 1인치도 안 되었다.

코흐는 전형적인 독일인답게 매우 신중하고 철저한 사람이었다. 조수들이 결핵균을 발견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음에도 그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코흐는 곧바로 자신의 발견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론에 착수했다.

우선 코흐는 죽어 가는 실험동물들의 몸에서 간균을 분리한 후 그것들을 쇠고기 추출액으로 만든 고형배지 위에서 기른 뒤 그 균의 순수 집락을 얻었다. 그것을 다른 균과 격리시켜 수개월 동안 배양한 뒤 건강한 동물들에게 접종하자 동물들이 결핵에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실험용 동물들이 결핵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코흐는 자신의 실험이 실패한 원인으로 결핵균이 살아 있는 동물의 몸속에서만 자란다고 추측했다. 소위 결핵균은 완벽한 기생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유명한 배지인 혈장 젤리를 발명하여 보통 배지에서는 자리지 않는 까다로운 미생물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의 예측은 놀랍게도 정확하게 들어맞아 결핵에 걸린 원숭이와 황소, 기니피그에서 얻은 치명적인 간균을 43종이나 혈장 젤리 시험관에서 배양했다. 그 균을 건강한 동물에 주사했고 건강한 동물들은 결핵에 걸렸다.

코흐는 드디어 결핵균을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코흐는 사람들이 먼지 속에 있는 균을 흡입하거나 혹은 결핵 환자들의 기침 때문에 결핵균이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건강한 동물도 그런 경로로 병에 걸리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실험은 매우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코흐 자신이 결핵에 걸릴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는 결핵 환자의 기침으로도 결핵균이 옮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코흐는 결핵에 걸리지 않았다. 1882년 코흐가 결핵균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세계를 강타했다. 그러나 코흐는 그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발견한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2005.05.16 13:50
  2005.05.16 ⓒScience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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